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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곁에서 사라지는 구포다리

by 부산부동산아재 2008.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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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구포다리 모습

 

 

아직 남아 있는 구포다리의 모습과 구포다리 북쪽으로 구포철교가 건설되어 있다.

 

 

끊어져 있는 구포다리의 모습

 

 

철거 작업으로 교각만 남아 있는 모습

 

 

철거 작업으로 이제 한갓 산업 폐기물이 되어 버린 교각

 

 

 

서부경남과 부산을 이어주던 구포대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2008년 4월 8일 현장을 찾아 보니 한창 철거 작업이 진행 되고 있었다.
구포다리는 1930년 9월 연인원 7760명이 동원돼 2년 6개월만에 완공이 되었다.
구포다리는 정식명칭이 낙동장교(洛東長橋)라는 이름처럼 1060m의 다리로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일제는 구포다리를 세움으로서 서부경남의 물자를 부산으로 실어와서 부산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 운송해 갈려는 목적이 컸다.
구포다리의 건설은 김해지역 주민들의 찬성과 구포지역주민의 극렬 반대로 구포지역주민은 건설비를 부담하지 않기도 했고
전기료 부담 문제로 김해지역 청년회와 구포지역 청년회간에 줄다리기로 정하기로 하여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김해지역이 져서 이에 격분한 김해지역 청년들이 조명기구를 깨부수기도 하였다.
한국전 때는 부산항을 통해 들여온 군수물자가 구포다리를 통하여 전선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는 나룻배로 물건을 실어 날라야 했고 장마라도 지면 이마저도 어려운 사항이었다.
개통이후 수많은 서부 경남이나 전라도 지역의 사람들의 청운의 꿈을 안고 혹은 먹고 살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구포다리를 건너 부산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애환을 간직한 구포다리가 역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하하기 시작하였고 2003년 9월 14일 태풍매미로 교각이 유실되어 철거와 보존 사이에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철거가 결정이 되었다.
과연 안전과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이 후대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마음으로 시한수를 소개한다.


"일흔한 살 나이 고이 간직하여
칠백리 낙동강 끝자락 움켜쥐고
파란 물결에 다리 담그고
오직 그 자리 지키고 서서
길고 장엄한 너의 모습 볼수록 즐겁다
길고 장엄한 너의 모습 볼수록 아름답다"

권성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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